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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9. 건축을 생각하다 Thinking Architecture by Peter Zumthor, 2013

최종 수정일: 2024년 3월 25일

김봉찬 대표님이 추천하신 페터 춤토르의 2권의 책 중 먼저 '건축을 생각하다'. 지난 일요일이 반납하는 날이었는데 아직 반도 읽지 못했고 그래서 급하게 읽느라 내 머리속에서 쉬이 사라지기전에 이렇게 블러그 남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쉬이 사라지는 만큼 쉬이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의 연속이지만 흥미로웠습니다.




사물을 보는 방식


전형적인 평범한 부엌이었다. 전혀 특별할 게 없었다. 그런데도 부엌이 그토록 특별하게 느껴진 까닭은 내 머릭속에 사라지지 않는 기억으로 자연스레 각인된 추억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모의 부엌이 지닌 분위기는 내가 생각하는 부엌의 이미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햇살을 받아 따듯하고 부드러운 아스팔트, 밤나무 잎으로 가득 덮인 판석...이런 기억들은 내가 아는 가장 심오한 건축적 경험이다. 기억은 건축 작업을 할 때 마다 참고하는 건축적 분위기와 이미지의 저장고이다.


소재 자체가 시적인 것, 사용된 소재가 특정한 건축적 맥락에서 갖는 의미를 끊임없이 질문해 봐야 한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음악은 종종 '건축'에 비견된다. 선율, 화음, 리듬에 집중해도 전체 구성의 느낌을 잃지 않는다. 바흐의 음막은 분명한 구조 위에 세워져 있다. 나는 모든 건축물의 핵심은 시공 행위에 있다고 믿는다.


건축은 내부와 주변의 삶을 담는 봉투이자 배경이며 바작에 닿는 발자국의 리듬, 작업의 집중도, 수면의 침묵을 담는 예민한 그릇이다.


건축 드로잉은 해당 건물에 들어설 장소에서 뿜어낼 아우라를 최대한 정확하게 표현해야 한다. 건축적 묘사가 지극히 자연스럽고 세밀하게 완성되어 그 드로잉을 보는 사람의 상상력과 호기심이 파고들 여지가 별로 없다면 우리의 열망도 묘사에 그치고 만다. 미래에 존해하는 현실을 담는 드로잉은 내 작업에 있어서 중요하다. 내가 찾는 주요 분위기가 표현될 때까지 나는 계속 드로잉을 전념하다가 불필요한 요소들이 디자인을 손상시키기 시작할 때 드로잉을 중단한다. 드로잉에는 내가 추구하는 대상의 특성이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 이러한 드로잉을 보면 아직 존재가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대상을 한 걸음 물러나서 바라보며 음미하게 된다.


성공적인 디테일은 장식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시선을 자극하거나 눈에 거슬리지 않고 오히려 가신이 속한 전체에 대한 이해로 인도한다. 낡은 계단의 철판을 지탱하는 두 개의 못과 같은 디테일은 우리의 관심을 자로 잡는다. 어쩌면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다.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우언가가 마음을 움직인다.


건물이 서 있는 자리에 그 건물이 없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나는 당신이 보는 모습 그대로다. 나는 이곳에 속해 있다. 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그 장소의 형태와 역사의 일부가 되는 건물을 설계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건물이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의 감정과 생각에 호소할 수 있을 때 그 건물은 주변 환경에 수용될 수 있다. 우리의 감정과 이해는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건물과의 감각적인 교감은 기억의 프로세스에 바탕을 두고 일어난다.


작품은 입구가 없고 접근 불가능한 내부 역시 숨겨져 있었다. 이 비밀스러운 면모는 작품의 여러 특성 위에 신비로운 아우라를 부여했다. 나는 드러나지 않는 구조와 시공이 건물이라는 몸에 내적긴장과 진동을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계 프로세스는 감정과 이성의 끝없는 상호작용에 기반한다. 자연스럽게 떠오른 감정, 취향, 열망, 욕구 또는 형태를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는 추론이라는 비판력에 통제받는다. 갑자기 출몰한 내면의 이미지 때문에 설계에 새로운 선이 하나 추가되면 설계 전체가 달라진다. 한 순간에 새로운 형태가 나온다. 강력한 약이 잡자기 효능을 발휘하는 것과 비슷하다. 기쁨과 열정 속에서 내 속의 깊은 무언가는 이런 확신을 준다. '이 집을 짓고 싶다.'


설계는 발명이다.

건축사를 비롯한 설계 관련 교육은 나름의 교육적 가치를 갖고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건축가로 활동하다 보면 거축의 역사에 담긴 지식과 경험의 무한한 보고와 친숙해 진다. 그 역사의 보고를 작업과 결합시킬 때 진정한 우라만의 것을 만들 가능성이 높다.


나는 설계할 때 내가 원하는 건축과 연관성을 가진 내 기억속의 이미지와 분위기로 방향을 잡는 편이다. 생각에 떠오로는 이미지들은 보통 주관적인 경험에서 출발하며 건축의 세부묘사가 수반되는 경우는 극히 들뭉다. 나는 풍성한 시각적 형태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떠오른 이미지의 의미를 설계하는 내내 고민한다. 일정 시간이 흐르면 내가 설계한 대상은 내가 모델로 삼는 이미지의 특성을 가진다. 여러 특성을 제대로 조합하여 결합하면 해당 대상에 깊이와 풍성함이 배가 된다. 형태와 구조, 외관과 기능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어 전체를 형성한다.


아름다움의 핵심

'기계란 불필요한 부품이 없는 물체'

'아름다움은 어떠한 상징이나 메시지도 전달하지 않는 원시 상태의 자연 안에 존재한다.'

내가 생각한 건물이 장소와 기능에 정확히 부합한다면 굳이 예술적 장식을 첨가하지 않더라도 건물 자체가 힘을 가질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나는 모든 설계와 시공이 끝난 주택을 사람이 사는 장소이자 세상의 일부로 그 자리에 두고 건축가가 부연 설명 없이 떠나도 괜챦은 작업을 꿈꾼다. 건물에는 아름다운 침묵이 있다. 건축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 건물은 무언가를 나타내거나 대표하지 않고 건축 자체로 존재한다.


사물을 향한 열정에서 사물 자체로


매일의 작업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내가 현재 하는 일이 무엇이며 왜 하는지를 생각해 보는 건축에 대한 반추가 나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나는 이 성찰의 행위를 좋아하며 그것이 필요하다.


나 개인적으로 이것은 새로운 깨달음이 아니라 내가 작업하며서 계속 추구한 생각에 대한 화증이다. 이는 내 안 깊숙이 뿌리내린 소망에 대한 확증이기도 하다.


장소와의 관계에서 특별한 존재감을 가진 건물을 보면 그 장소와 그 장소를 넘어서는 무언가와 관련된 내적 긴장감이 건물을 채우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건물이 그 장소의 본질의 일부이자 세계 그차체를 말하는 것 같다.


'이론적으로나 기능적으로나 여러모로 흥미로운 건물이 분명합니다. 다만 문제는 그 안에 영혼이 없다는 것입니다.' 몇 주 뒤에 나는 아내와 야외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영혼을 가진 건물에 대해 이야기 했다. 우리가 흥미를 느끼는 범주에 속하는 건물들이 무엇인지는 알았지만 그 건물들의 특성에서 공통분모를 찾기 어려웠다.


  1. 건물이 속한 장소는 물론이고 내 평범한 일상, 여러 활동 및 감정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공간적 상황을 제공하는 건물, 나에게 살고 싶다는 기대감을 주며 내 필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그한 공간을 떠올릴 때면 어느 화가가 자신과 손님들을 위해 설계했다는 이 산속 호텔이 생각난다.

  2.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배려가 느껴졌다.

  3. 충분한 가치가 있는 방문이었다. 나는 단순성과 실용성에서 작업을 시작하여 크기를 늘리고 더 좋고 더 아름다게 만들어야 겠다고 새롭게 다짐했다. 자신이 하는 일을 깊이 깨달은 장인의 마음으로 단순성과 실용성을 형태의 출발점으로 삼기로 했다.

  4. 나는 분위기를 흡수하고 다양한 공간적 상황에 노출되는 것이 좋다. 어떤 감정이나 강한 인상을 보유할 수 있을 때 만족을 느낀다. 그 기억에서 디테일을 떠올리거나 나에게 따듯함, 안전함, 편안함, 공간감을 주었던 기억 속 장소를 끄집어 내는 것이 좋다.


건축의 교육과 학습, 아름다움은 형태가 있는가?

건축 교육이란 스스로 질문하고 교수의 도움으로 잡을 찾으며 질문을 줄여나가면서 다시 해답을 찾는 것이다. 이 과정의 무한 반복이다. 건축적, 공간적, 다색적, 감각적 그림과 이미지에 대한 연상적이고 야생적이고 자유롭고 정돈되며 체계적인 사고,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의 정의다.


  1. 재즈 콘트라베이시스트 찰스 밍거스의 1950년대 음악, 느린 리듬과 차분한 여유 속에 강력함과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나는 음악이 만든 공간안으로 들어갔다. 다채로우면서도 감각적인, 깊이와 운동이 있는 공간, 그 안에 머울렀다. 잠시였지만 음악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2. 로스코의 그림

  3. 자연의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에는 인간을 초월하는 위대한 무언가가 있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와서 자연으로 돌아간다. 경관을 본다. 저 멀리 수평선과 바다의 매스가 보인다. 아카시아가 만발한 들판으로 걸어간다. 노간주나무 아래 피어있는 엘더꽃들을 말없이 바라본다.

  4. 이슬비가 내리고 공기는 따듯했다. 펼쳐진 우산과 버튼을 채우지 않은 레인코트에서 도시의 세련미가 느껴졌다. 그들을 감싼 햇살은 부드러웠다. 층층이 두껍게 쌓인 연회색의 안개구름을 똟고 햇살이 내려왔다. 햇살이 자그마한 빗방울을 빛나는 입자로 바꾸었다. 따사로운 광채가 전면을 가득 채웠다.

  5. 사물과 사람들, 그 모든 물리적 대상과 별도로 나를 감동시킨 것이 있었다. 홀로 있다는 것. 가만히 앉아서 보고 듣는 동안 가졌던 내 감정, 느낌, 기대감이 있엇다.

  6. 과연 나는 건축가로서 내가 설계한 작업에 어떤 식으로든 건축적 분위기의 정수를 담고 있는가?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가? 다른 방법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함을 주는 건축적 경험을 가능케 하는 마법의 주문이 있는가?

  7. 트렌디한 디자인에 관심이 없는 나는 그의 작품세계를 알지 못했다.

  8. 프로젝트가 우리로부터 벗어나 독립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법칙에 순응하는 독립체로 진화한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일을 하기 위해, 집처럼 편안하을 느끼기 위해 주변에 두는, 방과 공간과 장소를 구성하는 사적인 물건에 대해서도 즐겨 생각한다. 건축은 공간의 예술이며 시간의 예술이다. 그것은 질서와 자유 사이, 길을 따라가거나 스스로 길을 찾고 방황하며 거닐고 이끌리는 것 사이에 존재한다. 나는 태양을 고려하여 소재, 표면, 모서리, 유과, 무광을 선택한다. 사물을 비추는 빛의 마법에 따라 솔리드의 깊이, 음영과 어둠의 차이가 만들어진다. 모든 것이 적절해 지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경관 속의 빛

빛의 그림자, 달의 빛과 그림자, 우리 집 거실 램프가 만든 빛과 그림자를 연구하다가 스케일과 치수에 대한 감각이 생겼다. 나는 빛에 대한 책을 쓰고 싶다. 빛만큼 나에게 영원을 생각나게 하는 것은 없다. 내가 무언가를 보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빛이 굴절하여 우리가 이해할 수 잇는 형태를 만들거나 형태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어둠은 땅에 산다. 땅에서 솟아 올랐다가 거친 숨결처럼 땅으로 돌아간다.


그늘과 그림자가 생겼다가 빛이 되듯이 마이뢰커는


다나자키 준이치로는 그림자를 찬양하며 그림자는 빛을 찬양한다. (책: 그늘에 대하여)


건축과 경관

경관은 자연이 나와 가까이 있고 나보다 거대하다는 느낌과 더불어 집처럼 편안한 느낌을 준다. 하늘, 냄새, 빛, 색, 형태 등 어린 시절의 경관은 내 살이 되고 피가 되었다. 그곳으로 돌아가면 집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마음을 다해 보고 사랑하고 주의를 기울이고 올바른 수치와 균형을 찾고 경관이 건물을 수요할 수있는지를 알기 위햇 경관 속에 자리할 건물의 모습을 끊임없이 상상한다. 땅과 지형을 무엇보다도 사랑해야 한다. 지형에 변경을 가해야 한다면 원래 모습이 그린 것처럼 보여야 한다. 경관 속에 무언가를 지을 때 건물의 자재가 그 경관에서 역사적으로 자란 소재와 어우러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재와 시공은 장소와 연관성을 가져야 하며 때로는 그 장소에서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관이 새로운 건물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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