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을 반쯤 넘기고 나면 뒤늦게 돋아난 솔비나무(낙엽소교목, 한라산자생)가 잎을 열어 하늘을 덮을 때 봄은 조금씩 물러나고 여름은 멀리서 손을 내민다.
솔비나무: 다른 낙엽수보다 한달이나 늦게 깨어나고 늦게 돋은 순을 펼치는 데도 한참이 걸리는 느긋한 나무
폐허정원 뒤로 모아심은 녹색의 침엽수를 배경으로 화사하게 도드라지는 말발도리속 식물의 흰꽃과 개키버들 '하쿠로 니시키'의 새순
빗물정원에는 작약속 식물의 꽃과 푸르른 녹음이 가득차고 이끼정원의 비비추 '블루카뎃'은 옥색이 감도는 잎으로 땅을 켜켜이 덮어 더욱 단단해져 간다. 그늘에는 산수국, 수국, 비비추가 꽃을 피우고 풍지초 '아우레올라'는 잎이 무성해 진다.
무늬쥐똥나무(Ligustrum obtusifolium 'variegata' )의 하얀 꽃(검은 색 쥐똥과 같은 멸매)이 5월이 저물때 쯤 만개하면 그 향기가 주변에 넘쳐나고 비파나무(Eriobotrya japonica)의 열매는 노랗게 익어 새들을 부른다.
그 밖에...
솔잎금계국 '자그레브'의 노란꽃
퍼너리 주변을 수놓았던 클레마티스 '이베트 아우리'는 조용히 꽃잎을 닫고 있고
사람주나무의 만개한 꽃
산딸나무 '미스 사토미'도 분홍색 포엽을 열어 개화 시작
입구정원의 멜리니스 '사바나'(루비그라스)의 봄꽃, 살비아, 에린지움, 니겔라속, 정향풀속 식물, 그리고 다양한 품종의 에키나시아(자주천인국속)가 봄부터 여름까지 내내 꽃을 피운다.
멜리니스 '사바나'(루비그라스)
봄부터 초여름 사이 으아리속(클레마티스) 덩굴식물이 절정을 이룬다. 순식간에 벽면을 덮어 빛을 차지하는 이 가늘고 여린 덩굴손은 엄청난 용적의 거칠고 무거운 덩굴식물도 단단하게 붙들어 맨다. 거목이 뽑힐 정도의 거센 태풍에도 줄기 끝에 생긴 어린 덩굴손은 아무일 없듯이 하늘거리고 있었다. '부드러운 것은 강한 것을 이긴다는 말'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머루의 덩굴손은 매우 유연한 곡선이다. 곡선은 직선과 달리 선으로 강조되기 보다 공간의 여백을 드러내 담아내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6월과 함께 찾아온 여름
억새와 수크령의 새잎은 완연히 성장
떡갈잎 수국
애키나시아
리아트리스
톱풀
리나리아
버베나
모나르다
아가판서스
동폐허정원 주변의 온종일 해가 드는 양지 - 그라스와 함께 한해살이 식물이 가득하다. 한해살이 식물들: 아미속, 회향속, 캘리포니아 포피 '아이보리 캐슬'은 정원 곳곳으로 씨앗을 흩뿌려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살아움직이듯 이동하고 번성하는 식물들은 가끔 너무 무성해져 당황스러울때도 있지만 단기간에 다채로운 색깔과 형태로 정원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이끼정원-가는잎처녀고사리, 청나래고사리, 나도히초미(청나래고사리에 비하면 색이 짙고 질감이 단단해 훨씬 강한 힘이 느껴진다)
서페허정원 - 암대극과 가는잎나래새(털수염풀)는 결실을 맺고 본격적으로 여름잠을 준비한다. 제주 바닷가 갯바위에 서식하는 암대극과 중미 건조한 초지대에 서식하는 벼과 가는잎나래새는 전혀 다른 환경의 식물처럼 보이지만 여름철 폭염을 피해 휴면한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잔뜩 웅크린 것처럼 반구형으로 잎이 모여 나온 암대극도 가는 잎이 촘촘하게 돋아난 가는잎나래새도 모두 건조한 환경 때문에 생기는 수분 스트레스를 이겨 내기 위한 진화의 결과물이다. 털수염풀의 가늘고 유연한 선이 만들어 내는 무수한 여백안으로 빛과 바람이 담길 때 느껴지는 감정.
-가는잎나래새(털수염풀) 식재 팁:
건조한 초지대에서 자란 가는잎나래새는 제주의 다습한 장마철 기후에 매우 취약한 편이다 (국립수목원 건조한 아열대 온실에 있었던). 몇해 동안 잘 크다가도 식재 후 수년이 지나 포기가 커진 개체는 장마 이후 고사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배수가 잘 되는 양지에 너무 촘촘하지 않게 심고 지난 친 멀칭은 기부를 과습하게 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휴면기에 지상부의 잎을 자르거나 휴면 후 하부에 켜켜히 쌓인 마른 잎들을 제거해 통풍이 원활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가는잎나래새(털수염풀)의 군락의 갈색물결
초여름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단연 가는잎나래새(털수염풀)의 갈색물결이다. 봄부터 꽃을 피우고 여름에 씨앗을 맺는데 꽃자락부터 말라 가는 잎은 이즈음 완연하게 은은한 황갈색으로 물들고 여름꽃잔치가 너무 지나치게 들썩이지 않게 진중하게 무게를 잡아준다. 온화하고 부드럽게 그러나 거스를 수 없는 힘으로 초여름 꽃들을 아우른다. 정원에서는 보통 군락으로 심고 용설란속(아가베), 대극속, 자주천인국속, 부추속, 배암차즈기속, 리아트리스속 등과 함께 심는다.
장마와 빗물정원
6월 부터 시작되는 비는 정원의 색을 더 짙게 만들어 깊이감을 더하고 물인 고인 빗물정원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잎끝을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과 후드득거리는 빗소리, 파동을 그려 래는 동심원은 이 작은 정원을 끝도 없이 깊은 원시의 세계로 인도한다.
솔비나무의 피목
꼬랑사초
제비꼬리고사리
빗물정원
빗물정원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식물들에게 장마는 스트레스다. 특히 장마를 경험한 적 없는 지중해성 기후나 건조한 사바나 기후의 식물들에게 동아시아지역에 나타나는 독특한 기후환경은 그저 난감하거나 혹독할 뿐이다. 수염풀속(가는잎나래새), 멜리니스속과 같은 식물들은 고온다습한 환경에 이겨내지 못하고 잎을 떨구고 힘을 잃어 가기도 한다.
매혹적인 은녹색 식물들
건조한 기후에 자라는 은녹색 식물들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꽃 또한 화려하고 다채로운데, 크라스페디아 글로보사(Craspedia globosa 골든볼, 드럼스틱)는 대표적인 은녹색 식물로 신비로운 잎의 색감과 길게 뻗은 꽃대, 사탕처럼 달린 둥근 꽃이 아주 인상적이다. 하지만 이 식물에게 장마는 여름내내 아주 혹독한 시련이다. 대부분의 어린식물들이 그렇듯이 놀라운 적응력과 강인함으로 어린 크라스페디아 글로보사는 생각보다 건강하게 자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가 지나 식물체가 커지고 잎이 무성해지면 장마 이후 심한 몸살을 앓거나 잎이 문드러지면서 갑자기 죽어 버릴 수도 있다. (이외에 블루 페스큐도 대표적인 은녹색 식물)
신비로운 은청색 Craspedia globosa
은녹색 식물 식재 팁:
무엇보다 토양조건이 중요하다. 해가 잘 드는 곳에 주변보다 지면을 높게 하면 배수가 수월해 더욱 효과를 볼 수 있다. 식재용토는 지면 아래로 최소 30센티미터 정도의 깊이만큼 물빠짐이 좋은 흙으로 바꿔 주고 여유가 되면 용토 밑에 자갈을 깔아 배수층을 만들어 주는 것이 좋다. 식물을 너무 촘촘하지 않도록 거리를 두어 심고 크기가 커지면 지면으로 쌓이는 묵은 제거해 통풍이 원활하도록 도와준다.
이끼정원
장마철의 높은 습도는 이끼를 번성하게 할 것 같지만 사실 대부분의 식물이 그렇듯 이끼도 토양배수에 민감하다. 물빠짐이 좋지 않은 다져진 땅이나 지속적인 수분 공급은 토양 호흡에 문제를 일으켜 식물의 생육을 방해한다. 깃털이끼, 솔이끼는 번성세가 주춤하나 토양조건에 둔감한 우산이끼는 영토를 넓혀 간다. 하지만 자연에는 절대강자가 없으니 여름이 지나면서 이끼정원의 판도는 달라진다. 그러니,
억지로 우산이끼를 긁어내기 보다 잠시 관망하며 이끼의 이동을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마치 파도가 들고 나는 것처럼 환경의 변화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서기를 반복하며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나간다.
이끼정원의 안개분수
이끼정원을 만들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육기반이 되는 토양이다. 배수가 불량한 토양은 생육을 저해하고 쇠뜨기 같은 잡초를 유발한다. 비가 오는 상황을 대비해 적절한 배수로를 확보하고 적절한 식재용토를 준비해야 한다. 공중습도로 고민해야 한다. 조성지의 북서풍을 차단하고 주변에 낙엽수를 심어 주면 겨울철에는 차고 건조한 바람을 막고 여름철에는 뜨거운 햇살을 순화시킬 수 있다. 주변보다 지형이 낮은 곳을 활용해 자연스럽게 비바람을 차단하고 습도를 높일 수도 있다. 안개분수 설치도 한 방법인데 입자가 가는 물방울을 사방으로 분사시켜 이끼정원의 습도를 유지하고 지면 온도를 낮추어 준다. 단, 장마철에는 과도한 수분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으니 중단하기도 한다. 베케의 경우, 장마 후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시작하면 하루 3회 (11시, 1시, 4시) 회당 1분 30초 식 가동하며 기온이 덮거나 건조한 날에는 오후 2시에 1회 추가한다.
출처: 베케, 일곱계절을 품은 아홉정원(글, 사진-김봉찬, 고설, 신준호), 구글, Pinterest, 인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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