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 꽃에서 씨앗으로 | 영국왕립원예협회 컬러칩으로 식물색 찾기 | 라벤더 아로마
- 2025년 10월 26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5년 11월 13일
가을이 한층 깊어지고 있습니다. 기온이 낮아지고 일조량이 줄어들면서 꽃과 잎의 색이 뚜렷하게 변하는 시기입니다. 어르신들이 가꾼 정원에는 지금 층꽃나무의 잎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는데요. 일정한 간격으로 층을 이루며 피어나는 독특한 꽃차례와 달콤한 향, 풍부한 꿀로 온갖 생명들을 불러들이는 층꽃나무가 이제는 누구보다 먼저 붉은 빛 잎으로 정원을 더욱 가을답게 만들고 있습니다.

층꽃나무의 붉게 물든 잎
가을은 결실과 수확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꽃이 진 뒤 맺히는 씨앗과 열매는 그 자체로도 아름다워 관상가치가 높으며, 겨울철에는 정원을 찾는 새들에게 소중한 먹이가 되어 줍니다. 오늘은 어르신들과 함께 지난 봄에 심었던 톱풀, 긴산꼬리풀, 헬레니움, 가우라의 마른 씨앗을 채종해 보려 합니다. 씨앗이 발아하여 생장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뒤 휴면이나 사멸에 이르기까지의 식물 생애주기는 계절의 변화와 함께 순환합니다. 이러한 자연의 주기는 어르신들이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장소에 대한 지남력(知覺力)을 익히기에 더없이 좋은 학습 환경이 되어 줍니다.
톱풀의 개화와 결실
헬레니움의 개화와 결실
가우라의 개화와 결실 (어르신 손등에 비친 가우라 씨앗)

마른 씨앗이 달린 줄기
손끝으로 질감을 느끼며 마른 씨앗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분리해 봅니다. 헬레니움의 씨앗 끝에는 짧은 털 모양의 부속체가 달려 있는데 이를 털거나 흔들면 씨앗이 떨어집니다. 씨앗의 크기가 매우 작아 자칫 놓치기 쉬우니 주의가 필요합니다. 톱풀의 씨앗은 길쭉한 타원형으로 연한 갈색을 띠며, 한 송이의 꽃머리마다 수십 개의 씨앗이 맺힙니다. 한 포기의 식물에서 수천 개의 씨앗이 익어 나눔용으로도 넉넉합니다. 가우라의 씨앗은 좁쌀만 한 크기에 갈색빛을 띠며, 끝이 약간 뾰족하고 겉이 단단합니다. 씨앗이 작아 떨어지면주변에 자연스럽게 번식하고, 발아율도 높은 편입니다.
헬레니움, 톱풀, 가우라 씨앗 (좌측부터)

씨앗 이름을 맞춰 보세요!
씨앗 봉투에 식물의 이름과 수확한 날짜를 적어 둡니다. 그리고 서늘하고 어두운 곳에 잘 보관했다가, 내년 따뜻한 봄이 찾아오면 다시 정성껏 파종해 보겠습니다.
씨앗 봉투에 담고 날짜 적기
씨앗 채종을 끝내고 오늘은 몇달 전에 사두었던 RHS 컬러차트(Royal Horticulture Society Colour Chart)를 정원치유 프로그램에 접목해 보려 합니다. RHS 컬러차트는 영국왕립원예협회에서 제작한 컬러칩으로, 식물의 꽃과 잎, 열매, 줄기 색을 표준화하여 기록하고 비교할 수 있도록 만든 색 기준표입니다. 정원, 식물학, 원예, 디자인 등 여러 분야에서 색을 일관되게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죠. 다양한 컬러가 담긴 차트를 활용해 꽃의 색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식별하는 활동을 시도해 보려 합니다. 색을 바라보며 느껴지는 감각적 자극이 자연스러운 대화와 기억의 회상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참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선, 정원에서 어르신들이 마음에 드는 꽃 몇 송이를 골라 커팅해 옵니다. 춘희 어르신과 미자 어르신은 버들잎 해바라기 ‘골든 피라미드’와 해변국화를 손에 들고는 이내 머리에 꽂으시네요. 단발머리 미자 어르신은 한쪽 귀에, 춘희 어르신은 양쪽 귀에 나란히 꽃을 꽂으시는데, 그 모습이 마치 초등학생 시절의 천진난만한 소녀들 같습니다. 인덕 어르신은 조심스럽게 여러 송이를 모아 작은 미니 꽃다발을 완성하십니다.
꽃을 귀에 꽃으니 쌍둥이 자매 같습니다.

인덕 어르신의 미니 손 꽃다발
자, 이제 본격적으로 잘라 온 꽃을 컬러차트의 색과 나란히 두고 비교해 보겠습니다. 꽃의 색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가장 비슷한 색을 찾아보는 시간입니다. 먼저 버들잎 해바라기 ‘골든 피라미드’를 살펴봅니다. 컬러차트에는 순수한 노란색부터 녹색이나 주황, 빨간빛이 살짝 섞인 노란색까지, 채도와 명도에 따라 세밀하게 구분된 색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옥선 어르신은 차트를 이리저리 넘기며 꽃잎을 대어보다가, 15페이지의 선명한 노란색(Vivid Yellow)을 선택하셨습니다. 색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는 일이 쉽지 않아 눈이 피로하고 집중력도 필요하지만, 끝까지 집중해주신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따뜻한 색감을 좋아하신다는 옥선 어르신은 "이런 색을 보면 마음이 포근해진다"고 덧붙이셨습니다.
버들잎 해바라기 '골든 피라미드'는 선명한 노란색
작고 앙증맞은 보라색 꽃을 유난히 좋아하는 화자 어르신은 이번에는 공작아스터와 아스터 ‘리틀 칼로’를 컬러차트의 구멍에 하나씩 넣어 색을 비교해 보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르신들은 파랑이나 보라처럼 한색 계열의 미묘한 색조를 구분하기 어려워하신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화자 어르신은 "보라색은 참 매혹적이야" 하시며 꽃잎을 찬찬히 들여다보셨습니다. 그리고는 공작아스터를 짙은 보라색에, 아스터 ‘리틀 칼로’를 옅은 보라색에 매칭하시며 만족스러워 하시네요.
공작 아스터와 아스터 '리틀 칼로'는 보라색 계열
짙은 보라의 깊은 매력에 이어, 이번에는 한층 담백하고 고운 흰빛을 살펴보았습니다. 혜숙 어르신이 선택하신 해변국화는 육안으로 보았을 때 순백색에 가깝습니다. 컬러차트와 함께 색을 비교해 보니 역시 다른 색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화이트 컬러칩과 가장 잘 어울렸고 해변국화의 하얀 빛이 “참 깨끗하고 순수해서 예쁘다”고 하시며 한참을 바라보셨습니다.
흰색 해변국화
16회차로 이어진 정원치유 프로그램이 이제 아쉽게도 다음 주 마지막 시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봄에서 초여름, 그리고 초가을에서 늦가을까지 — 4개월 동안 함께 정원을 가꾸느라 수고하신 어르신들을 위해, 오늘은 특별히 식물 오일을 이용해 ‘향기로 치유하는 시간’ 을 준비했습니다.
지난 5월, 정원에 심은 라벤더는 지금은 꽃이 졌지만, 잎을 손으로 살짝 비비면 여전히 달콤하고 은은한 향이 납니다. 라벤더의 향은 숙면을 돕고 심리적 안정을 유도하며, 치유 효과까지 과학적으로 입증된 식물입니다. 또 후각 저하는 치매 초기 증상 중 하나이기에, 식물의 향을 통해 무뎌져 가는 후각을 자극하는 치유 활동이 어르신들의 인지 건강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롯이 나를 위한 향기를 만들어 보며 작은 즐거움을 느끼시길 바랍니다.
눈을 감고 자몽, 귤, 레몬, 오렌지 아로마 맡기
상큼하고 시원한 감귤류의 향을 글로 남기기
아로마 선생님과 함께 만드는 향은, 라벤더와 레몬 오일을 로즈마리 워터에 섞어 만든 에티켓 스프레이입니다. 실내 공간에 뿌려 냄새를 제거하거나, 일상 속에서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공중에 가볍게 분사해도 좋습니다.
라벤더 X 레몬 X 로즈마리 워터 원료 소개
먼저 라벤더 팅처(라벤더 허브를 알코올이나 글리세린 같은 용매에 장기간 담가 성분을 추출한 액체)를 용기에 담습니다. 그 다음 라벤더 오일과 레몬 오일을 각각 10방울씩 넣고, 마지막으로 로즈마리 워터를 부어 가볍게 흔들어 섞으면 완성입니다.
라벤더 X 레몬 X 로즈마리 워터 스프레이
아로마 선생님과 함께 만든 에티켓 스프레이는 단순히 향을 즐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내 손으로 직접 향을 만들어 보는 경험이 특별하게 느껴졌는지, 오늘 정원사의 추억 일기장에는 식물 향기에 대한 글이 많이 남겨져 있습니다. 향기로운 식물을 늘 들고 다니며 맡을 수 없기에 아로마나 향수를 사서 뿌리곤 하지만, 이러한 향은 늘 순간적이므로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나 정원이라는 공간은 계절마다 각기 다른 식물 향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감각의 정원이 우리 곁, 어르신들 가까이에 있어 자주 이용할 수 있다면 참 멋진 치유 공간이 될 것입니다. 게다가 정원에는 다양한 생물 친구들도 함께하고 있으니 지루할 틈이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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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벌을 유인하는 밀원식물들
나는 친구들이 너무 좋아요. 공부도 하고 재미있었다.
인제 끝나가는 것이 너무 아쉬워요.
사진 보고 향수 만들고 너무 좋았습니다.
레몬, 로즈마리, 라벤다 식물 향들을 맡아 보았습니다. 좋은 향 너무 좋았습니다.
여러 향의 냄새를 만들었다. 기억에 남는 날, 감사합니다.
씨앗 모우기와 좋은 향기를 만들었다.
꽃씨도 따고 좋았습니다. 공부도 많이하고 좋았습니다.
정말 즐거웠어요. 오늘은 많은 것을 배웠어요. 재미있었어요.
향긋한 향수를 만들는 시간 너무 좋고 기억에 남을수 있어 아주 좋습니다.
24절기 중 하나인 상강은 양력으로 10월 23일 또는 24일경에 해당합니다. 이 즈음이면 단풍이 절정에 이르고, 겨울로 접어드는 길목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꽃과 잎에 맺힌 서리가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겨울정원의 풍경을 함께 나누고 싶지만, 본격적으로 추워지기 전에 어르신들과의 정원치유 프로그램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 늘 그렇듯 정관치매안심센터에서 어르신들을 찾아뵙겠습니다. 16번째이자 마지막 만남이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도록, 따뜻하게 잘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원에서의 런치 타임
[함께 합니다]
랩걸: 이혜숙 & 모모 (이이장), 송진희 (부산기장군치매안심센터)
코-크리에이터: 정정순, 김미자, 송옥선, 김화자, 박혜숙, 이종세, 송인덕, 이춘희
리빙랩실: 기장군 정관치매안심센터 치유정원
[우리의 파트너]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준 우리의 파트너: 부산기장군치매안심센터, 한국에자이, 디랩 (디멘시아 랩, 한국리빙랩네트워크), 나우(나를 있게 하는 우리)
[우리의 가설]
감각의 정원을 생활권 내에 조성하여 정원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은 치매인들이 안전하게 웰빙을 즐기며 가족, 주민들과 함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치유적 환경이자 돌봄 관계망 구축의 공간적 구심점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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